펠리컨은 왜 돌아오지 않았나 — 「스톰보이」가 말하지 않은 것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슬프다'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슬픔보다 먼저 당혹감이 왔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펠리컨이 아니라 마이클 키드먼(제프리 러쉬)의 얼굴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니라 노인의 시점으로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영화가 끝나고 한참 뒤였다."어른이 돼서 보는 성장 영화는 아이의 성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보여줄

Storm Boy

뿐이다."

01
이 영화는 사실 노스탤지어 영화가 아니다

「스톰보이」(2019)는 흔히 "자연과 교감하는 소년의 따뜻한 이야기"로 소비된다. 하지만 영화의 구조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의 편집'에 관한 이야기다. 현재의 마이클은 손녀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과거를 호출하는데, 그 회상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노인이 기억하는 소년 시절은 이미 한 번 선별된 버전이다. 펠리컨 미스터 퍼시빌과의 교감, 해변의 일몰, 핑거본 빌(트레버 제이미슨)과의 우정 — 이 모든 것은 지나치게 선명하고, 지나치게 아름답다. 실제로 우리의 기억이 그러하듯. 영화는 '그때는 그랬다'는 감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때를 그렇게 기억하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조심스럽게 건드린다.

02
펠리컨의 죽음이 슬픈 게 아닌 이유

많은 리뷰가 미스터 퍼시빌의 죽음을 영화의 정서적 클라이맥스로 지목한다. 물론 그 장면은 아프다. 하지만 나는 그 이전 장면이 더 오래 남았다. 미스터 퍼시빌이 한 번 날아갔다가 돌아오는 장면. 소년이 "그가 선택해서 돌아온 것"이라고 믿는 그 순간.

동물행동학적으로 펠리컨이 사람에게 각인되면 '돌아오는 행동'은 자발적 선택이 아니다. 영화는 이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 침묵이 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정직한 지점이다. 우리가 자연과의 '유대'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인간이 투영한 해석이라는 것. 그리고 그 해석이 틀렸더라도, 그 감정 자체는 진짜라는 것.

"영화는 '당신이 느낀 그 감동이 착각이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래서 그 감동이 덜 진짜였냐'고 되묻는다."

03
핑가의 이야기가 왜 부수적으로 느껴지면 안 되는가

원주민 인물 핑거본은 영화에서 소년의 '자연 친화적 스승' 역할로 기능한다. 이 구도는 사실 굉장히 위험하다. 비백인 인물이 백인 소년의 성장을 위해 지혜를 나눠주고 퇴장하는 전형적인 서사 패턴 — 이른바 '매직 니그로(magical Negro)' 구조의 변형 — 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작 소설 'Storm Boy'(Colin Thiele, 1964)의 시대 맥락과, 2019년 리메이크가 굳이 이 구조를 유지한 방식을 함께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핑거본은 단지 소년에게 자연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토지와 생명을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존재론을 보여준다. 문제는 영화가 그 깊이를 충분히 파고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핑거본의 서사가 더 두꺼웠더라면, 이 영화는 아동 감성 영화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될 수 있었다.

04
이 영화를 어른이 봐야 하는 이유

「스톰보이」는 아이들을 위한 영화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가장 강하게 타격받는 관객은 30~50대가 아닐까 싶다. 자연을 '경험'이 아닌 '콘텐츠'로 소비하게 된 세대.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동물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세대. 미스터 퍼시빌을 보며 우는 것은 펠리컨 때문이 아니다. 내가 한때 가졌다가 잃어버린 어떤 감각 때문이다.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이자면 — 세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느낌. 바람이 방향을 알려주고, 새의 울음이 날씨를 예고하고, 파도의 리듬이 시간을 알려주던 그 감각. 도시에서 자라거나, 도시로 흘러온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린 바로 그것.


*이 영화는 Tving에서 관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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