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아프게 시린 인간 군상에 대한 영화 Adieu, plancher des vaches!

오타르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1999년 작(국내에는 2004년경 소개되며 그의 '포도주 미학'과 함께 거론된) <안녕, 육지여!>(Adieu, plancher des vaches!)는 당신이 포착한 '비합목적성'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유머러스하고도 가슴 아프게 구현된 걸작입니다.

adieu, plancher des vaches

영화의 원제인 'Plancher des vaches'는 직역하면 '암소들의 바닥', 즉 '육지'를 뜻하는 프랑스 속어입니다. 배를 타던 선원들이 땅에 내려왔을 때 느끼는 안도감 혹은 지루함을 의미하죠. 이오셀리아니는 이 제목을 통해 안정적인 삶(육지)을 박차고 나가는 인간들의 엉뚱하고 비합리적인 일탈을 그려냅니다.


1. 계급을 가로지르는 '비합리적 탈주'

이 영화에는 목적 지향적인 삶을 거부하는 두 부류의 인간 군상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도 묘하게 닮은 꼴로 등장합니다.

  • 상류층의 아들 가스파르: 거대한 저택에서 하인들의 수발을 받으며 살지만, 그는 이 안락한 '목적지'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는 집을 나서서 일부러 접시닦이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빈민가 친구들과 어울리며, 부모가 정해준 탄탄대로를 이탈해 '고생스러운 무위'를 선택합니다.

  • 성공한 사업가 아버지: 헬리콥터를 타고 출근하며 부를 과시하는 아버지는 완벽한 목적 중심적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역시 남몰래 세탁소 여주인과 술을 마시거나 선술집에서 가짜 수염을 붙이고 변장한 채 시간을 보냅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가 부여한 '역할'이라는 목적을 버리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 순수한 유희와 방랑에 몰두합니다.

2. '포도주'와 '술기운'이 만든 무질서의 미학

이오셀리아니 영화에서 술(특히 포도주)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가식의 벽을 허무는 촉매제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순간, 고상한 귀부인과 거리의 부랑자는 친구가 됩니다. 여기서 술을 마시는 행위는 생산적인 활동이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비합목적적인 행위를 통해 인물들은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짜 인간'으로 마주 보게 됩니다. 감독은 술기운이 선사하는 이 느슨한 무질서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질서로 묘사합니다.

3. 선형적 서사를 거부하는 '관조의 미학'

이 영화에는 기승전결이라는 뚜렷한 서사적 목적이 없습니다. 카메라는 그저 이 사람 저 사람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들이 벌이는 소소한 소동을 관찰할 뿐입니다.

  • 우연의 연속: 인물들은 약속하지 않아도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고, 함께 술을 마시다 헤어집니다. 이러한 '우연성'은 효율을 강조하는 현대인의 '계획성'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 무성영화적 유머: 대사는 최소화되어 있고, 인물들의 몸짓과 소음(접시 깨지는 소리, 엔진 소리 등)이 서사를 대신합니다. 이는 논리적 설명이 필요한 '이성적 영화'가 아니라, 보고 느끼는 '감각적 영화'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4. 왜 '안녕, 육지여!'인가?

결국 제목인 "안녕, 육지여!"는 견고하고 딱딱한 현실의 논리(육지)를 떠나, 흔들리지만 자유로운 바다(비합목적적 삶)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이오셀리아니는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성공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지 않아도, 그저 오늘 하루 친구와 술 한 잔을 나누며 의미 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존엄은 충분히 증명된다고 말이죠.


총평: '쓸모없는 짓'의 위대함

<안녕, 육지여!>는 효율성이라는 감옥에 갇힌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가장 우아한 탈옥 매뉴얼입니다. 영화 속 군상들이 보여주는 앞뒤 안 맞는 행동들은, 사실 우리가 마음속 깊이 갈망하던 '자유의 몸짓' 그 자체입니다.

"인생은 원래 싱겁고 엉뚱한 것이며, 바로 그렇기에 살 가치가 있다"는 이오셀리아니의 통찰은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이 영화는 DVD를 구매하거나 공공도서관 라이브리에서 대여하여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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